한민족역사문화공원 : 새로운 한민족의 탄생과 지구경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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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1879년 ~ 1910년)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외 14가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당부 :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
(1910.2.14 사형공판에서)
동양평화론 주창: 국민과 아시아에 용기와 희망을 줌.
일본 관헌이 모시고 있던 위패 : ‘大明神重根’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뒤에는 누군가의 격려와 위로, 용기를 북돋아 주는 숨은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일대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안 의사의 용감한 삶의 이면에는 아들만큼이나 용감하고 나라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가 있었다는 사실이 역사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을 사살한 뒤 뤼순 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의 한 면에서 보여주듯이 조여사는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안 의사에게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고 당부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 15가지를 들었습니다.

0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02.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0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04.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요,
05. 정권을 강제로 뺏은 죄요,
06.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07. 철도, 광산, 산림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08.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09.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10. 교육을 방해한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요,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라고 요목조목 들어놨는데
 너무나도 당연한 죄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열사의 어머니, 조 여사의 삶과 활동을 조명한 3.1여성동지회 박용옥 회장의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의 항일 구국적 생애" 논문에서 “안중근이란 인물을 만든 것은 그 어머니의 ‘모성리더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 여사는 국채보상운동 때 자신의 패물을 선뜻 내놓아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9일자 의연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그 해 안의사가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을 결심했을 때 조 여사는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고 격려했습니다. 2년 뒤 안 의사가 이토 통감을 처단하고 수감됐을 때는 안의사 동생들을 보내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망치 아니하노니…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라”고 전했습니다. 또 사형이 선고된 뒤 편지와 함께 명주 수의를 보냈고,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그 수의를 입은 채 형 집행을 당했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앞두고, 자식에게 대한의 남아답게 용감히 죽음을 맞으라고 수의를 지어주면서 편지를 쓰는 어머니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어머니들, 아니 우리 모두는 자신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되지 않을까요?
또한 여순 옥 중 안의사의 고결한 성품에 감명 받은 일본관헌들은 자주 그에게 휘호를 부탁했습니다. 그 중 군인 신분인 헌병 지바 도시치의 부탁을 받고 써준 안의사의 휘호입니다. 비록 조국을 침탈한 적대국 군인의 부탁이었지만 “나라를 위해 몸 바침은 군인 된 자의 본분이다.” 라는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는 이 글을 지니고 고국으로 돌아간 뒤 집안에 작은 사당을 지어 ‘大明神重根’이란 위패를 만들어 봉안하고 죽을 때까지 아침, 저녁으로 참배를 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잘라 맹세하였고, 동양평화론을 주창함으로써 국민과 아시아에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을 살펴보면, 우리의 가슴을 크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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