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의 개국시조 (재위 BC 18~AD 28)
고구려 주몽의 셋째 아들.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로 보필을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고 건국하였으니, 이 때는 전한 성제 홍가 3년(BC 18년)이였다.
○ 주요어록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겠다.”
「삼국사기」
BC 5년(온조왕 14년)에는 남한산에 천도하였고, AD 9년(온조왕 27년)에는 마한을 멸망시켰으며, AD 19년(온조왕 37년)에 형(兄)인 비류(沸流)가 죽어 비류백제(沸流百濟)가 멸망하자, 온조는 나라의 명칭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고쳤습니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 주몽(朱蒙:또는 鄒牟)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도망왔을 때, 그 곳의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습니다. 주몽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했는데, 얼마 뒤 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비류(沸流), 둘째 아들이 온조였습니다.
뒤에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인 유리(琉璃)가 찾아와 태자(太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백성을 이끌고 남하했습니다. 비류는 미추홀(彌鄒:지금의 인천)에 정착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과 남한산성을 포함한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했습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 정착에 실패하고 죽었는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온조의 위례성에 합쳐진 후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습니다(AD19년, 온조왕17년). 그 세가(世家)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합니다.
한편, 「삼국사기」등에 기록된 온조왕 재위 연간의 대부분의 일들은 백제의 발전 과정에서 점차 이루어진 일들을 소급하여 실은 것으로, 당시 마한 전체를 통일했다는 기록도 훨씬 뒤의 일로 보이며, 또 백제연맹체의 단계를 넘어서는 왕권의 확립은 온조왕 때가 아닌 고이왕 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또한,〈삼국사기〉 백제전 온조왕조에 실린 별전에는 주몽이 온조의 의부(義父)이며, 백제의 건국자는 온조의 형인 비류라고 되어 있고, 비류와 온조를 낳은 이는 우태(優台)로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