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개소문 (A.D 594년(?) ~ 666년)
고구려 명장
당금무배(當今無輩: 당대에 당할 자 없는 仙輩) 로 유명함.
‘김해병서’라는 유명한 병서를 남김.
선도문화를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이 투철했던 고구려 명장.
외래사상 유입 경계, 한민족 고유 선도사상을 중심철학으로 조의선인의 최고 선배로서 중국 경극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로 당 태종이 두려워 함.
당을 정벌하고 한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 주장.
『조선상고사』: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英傑)이었다.’
연개소문은 홀로 장백산에 들어가 칼 솜씨를 닦은 지 수년 만에 고금에 드문 도선(刀仙)이 되니 따르는 무리가 수없이 많은 당금무배(當今無輩: 당대에 당할 자 없는 仙輩)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해병서’라는 유명한 병서를 남겼습니다.
선도문화를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이 투철했던 고구려 명장으로서 당태종이 이끈 당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승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도교 등 외래사상의 유입을 경계하고 한민족 고유의 선도사상을 중심철학으로 지키려고 노력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조의선인의 최고 선배로서 중국 경극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로 당 태종을 벌벌 떨게 만드는 인물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당 태종을 쫒아서 산동 성까지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야 말로 고구려의 걸출한 민족 영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영걸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당 태종(唐太宗:재위627-649) 이세민(李世民)도 연개소문만큼은 두려워했다"고 기록했으며, 지금은 실전되어 볼 수 없으나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걸출한 두 명의 위인인 재상 명림답부(明臨答夫)와 연개소문이 조의선인 출신이기에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또한 당을 정벌하고 한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큰 꿈의 나래를 펼치고자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 정치를 바로 잡았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英傑)이었다.’고 조선상고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언제나 말에 오정이라는 연못에서 물을 먹이고, 그 물가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 라고 하여 연개소문과 이 다섯 우물과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몽고의 사신이 오정을 찾아보고 그곳의 지맥을 누르기 위하여 이 다섯의 우물에 쇠말뚝을 만들어 깊이 박아 지맥을 끊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후부터는 넘쳐흐르던 물이 말라버렸다고 전해지며, 아직도 그 연못의 자취는 남아있다고 합니다.